그리고, 서재 — 현실 회귀물 소설
제5화: 같은 문, 다른 선택
2026.03.22 | 채택: myview52937님의 아이디어
📌 메인 채택: "허무한 죽음을 알면서도 NO라 하지 못한 시우. 풀타임 대학원생이 되기로 결심하고, 박지우가 동료 대학원생이 된다" — myview52937님
복도에 서서 폰을 들여다보았다.
기준: 랩미팅 어땠음?
기준: 아 그리고 지우가 뭐라 전해달라던데
나는 답장을 치다가 또 멈추었다.
'나는 괜찮다고.'
지우의 말. 그 네 글자를 전해야 하나. 기준이는 어제 '취소하고 싶다'라고 했고, 지우는 오늘 '괜찮다'라고 했다. 내가 모르는 맥락 위에 놓인 두 문장이다.
전생에서 나는 이런 걸 고민하지 않았다. 남의 말을 전하는 것도, 남의 감정에 끼어드는 것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나만의 마감에 쫓겨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침에 기준의 삼천 원 메시지를 보며 웃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이번에는 옆을 보려고 한다.
답장을 쳤다.
시우: 랩미팅 괜찮았어. 생각보다.
시우: 그리고 지우가 말 전해달라더라.
시우: 어제 네가 한 말, 자기는 괜찮다고.
보내고 나서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전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보다, 전하고 나서 기준이가 어떤 얼굴을 할지가 더 무서웠다.
• • •

학생 식당에서 기준이를 만났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한산했다.
기준이는 쟁반을 들고 맞은편에 앉더니 한참 동안 밥만 떴다. 카톡을 확인했을 텐데 아무 말이 없었다.
국을 한 숟갈 떠 먹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래, 괜찮대?"
"응. 자기는 괜찮다고."
"…그래."
기준이가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는데 눈은 웃지 않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그 말이 제일 무서운 거야."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무슨 뜻이야?"
"괜찮다는 말. 진짜 괜찮은 사람은 그 말을 안 해."
기준이가 국그릇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제와 같은 동작이었다.
"내가 어제 지우한테 했던 말이… 넌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라는 거였거든."
나는 가만히 들었다.
"그 말이 진심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끔찍해.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는 건 칭찬이 아니라 — 그냥 내가 신경 안 쓰겠다는 뜻이니까."
가슴이 뜨끔했다.
전생에서 누군가 나에게도 그 말을 했다. '시우는 알아서 잘하니까.' 그게 칭찬인 줄 알았다. 혼자 야근하고, 혼자 논문 쓰고, 혼자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버틴 6년. 아무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고, 나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전해줘서 고마워." 기준이가 말했다. "근데 시우야, 넌 왜 전한 거야? 원래 이런 거 안 하잖아."
"…그런가?"
"응. 넌 원래 남의 일에 안 끼어드는 사람이야. 근데 요즘 좀 달라."
기준이의 눈이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어제 '넌 자꾸 어딘가 가버릴 것 같다'라고 했던 그 눈.
"좋은 쪽으로 달라진 거야." 기준이가 덧붙였다.
나는 대답 대신 밥을 떴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 • •

오후 3시. 나는 공학관 5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507호 문 앞에 서는 건 오늘 두 번째였다. 아침에는 심장이 뛰었지만, 지금은 다른 감각이었다. 결심이 섰다는 감각.
노크했다.
"들어와."
김혁준 교수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안경 너머로 고개를 갸웃했다.
"오전에 왔던 학부생이지? 한시우."
"네. 아까 말씀하신 것, 대답하러 왔습니다."
교수가 노트북을 닫았다.
"빠르네. 보통은 며칠 고민하던데."
"전에도 고민을 오래 한 적이 있어서요."
전생에서 석사 지원을 결심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으로 대학원을 다닐 수 있을까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그리고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쳤다.
"랩에 지원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교수의 눈썹이 올라갔다. 학부생이 조건을 거는 건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풀타임으로 하고 싶습니다."
"… 당연히 석사는 풀타임이지 않나?"
"아, 네. 그게 아니라, " 나는 머리를 긁었다. "취업을 병행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연구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요."
사실 전생의 나는 석사 입학과 동시에 IT기업에 취직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논문을 썼다. 학자금과 생활비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둘 다 반쪽짜리가 됐다. 논문은 늘 마감에 쫓겼고, 회사에서는 눈치를 봤고, 몸은 3년을 버티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르게 하겠다. 돈은 어떻게든 된다. 조교 장학금이 있고, 아르바이트를 뛰더라도, 적어도 '연구'와 '생존' 사이에서 찢어지지는 않겠다.
교수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좋은 마음가짐이네. 요즘 학생들은 보통 반대로 물어보거든. 일하면서 다닐 수 있냐고."
"저도 그렇게 할 뻔했습니다."
교수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전생에서 이 사람이 웃는 걸 본 적이 있었나? 물론 있었겠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때 이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좋아, 한시우. 내 랩에서 보자. 졸업논문 마무리하고, 9월 입학 기준으로 서류 준비해. 자세한 건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하지."
"감사합니다."
문을 나서는데, 교수가 불렀다.
"아, 한시우. 혹시 박지우라는 학생 알아?"
멈추었다.
"…네. 이름은 압니다."
"같은 과 3학년인데, 이번에 랩에 지원 의사를 밝혔어. 자네가 관심 있다고 해서 이야기해 둔 건 아니고, 원래 작년부터 연구 참여를 하고 있던 학생이야. 내년에 같이 들어올 수도 있겠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박지우. 오늘 아침 캠퍼스에서 나를 불러 세운 사람. 기준이가 취소하고 싶어 한 말의 상대. '나는 괜찮다'라고 했던 사람.
그 사람이 같은 연구실에 들어온다.
전생에서 나는 이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같은 연구실에 있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기억이 흐리다. 회귀의 법칙 — 미래의 기억은 있되, 디테일이 흐릿하다.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일수록 더 흐리다.
"네, " 나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공학관을 나왔다. 캠퍼스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삼월의 해는 아직 짧아서, 4시가 넘으면 빛이 주황빛으로 바뀐다.
벤치에 앉았다. 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전생에서의 선택:
— 회사 + 야간 대학원 (3년)
— 김혁준 교수 랩
— 결과: 과로사
이번 선택:
— 풀타임 대학원
— 김혁준 교수 랩
— 결과: ?
같은 문을 열었다. 같은 교수, 같은 연구실. 하지만 조건이 다르다. 회사가 없다. 시간이 있다. 그리고 — 박지우라는, 전생에서 보지 못했던 사람이 옆에 있다.
왜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회귀했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치트키는 없다. 미래 기억은 흐릿하고, 주식을 사려해도 종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선택'뿐이다.
하지만 오늘 하나를 깨달았다.
선택이 바뀌면, 옆에 서는 사람이 바뀐다.
전생에서 나는 혼자였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연구실로 가고, 밤에 혼자 논문을 쓰고, 새벽에 잠드는 루틴. 그 안에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기준이가 있고, 지우가 있고, 김 교수가 웃는 얼굴로 '내 랩에서 보자'라고 했다.
기준에게 카톡을 보냈다.
시우: 나 김혁준 교수 랩 들어간다.
시우: 풀타임으로.
시우: 아 그리고 삼천 원 내일 갚음.
답장이 금방 왔다.
기준: ㅋㅋㅋㅋ 미쳤냐
기준: 갑자기 대학원?
기준: 근데 삼천 원은 진짜 갚아라
웃음이 났다. 진짜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한 가지 더 떠올랐다. 교수가 한 말.
'작년부터 연구 참여를 하고 있던 학생.'
박지우가 작년부터 김 교수 랩에서 연구 참여를 하고 있었다면 — 전생에서도 그랬을까? 그리고 전생의 나는 그걸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았는데 관심이 없었던 걸까?
지우가 아침에 했던 말이 다시 들렸다.
'나는 괜찮다고.'
괜찮다는 말이 제일 무서운 거라고 기준이가 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전생에서 한 번도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말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묻겠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괜찮냐고.
캠퍼스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삼월의 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주머니 속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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