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서재 — 현실 회귀물 소설
제4화: 문 앞에서
2026.03.21 | 채택: myview52937님의 아이디어
📌 메인 채택: "어딘가에서 시우를 부르는 목소리 — 박지우, 기준이가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 그 사람" — myview52937님
📎 서브 채택: 서재의문지기님 — 김 교수 랩미팅에서의 질문과 시간이 멈추는 듯한 순간
아침이 왔다.
눈을 뜨고 처음 한 일은 천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얀 천장. 기숙사 방의 형광등은 꺼져 있고, 창 틈새로 들어온 아침 햇빛이 얇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살아 있다. 여전히 2019년이다.
폰을 확인했다. 2019년 3월 5일, 오전 8시 14분. 기준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기준: 랩미팅 10시래
기준: 근데 넌 왜 갈 거야? 학부생잖아
기준: 아 그리고 치킨값 3000원 모자란 거 갚아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생에서 이 삼천 원은 영원히 갚지 않았다. 기준이도 한 번도 다시 말하지 않았다. 내가 입원했을 때 기준이가 보낸 문자를 기억한다. '빨리 나와, 치킨값이 아직 남아 있다.' 농담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문자를 읽으며 울었다.
지금은 삼천 원이 있다.
일어나서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 얼굴이 아직도 낯설다. 25살의 한시우. 다크서클은 있지만 31살 때보다는 옅다. 볼에 살이 좀 있고, 이마에 주름이 없다. 이 얼굴로 6년 뒤에 쓰러질 줄은 모르는 얼굴.
랩미팅에 갈 것인가.
김혁준 교수의 연구실. 공학관 5층 507호. 전생에서 나는 그 방에서 3년 가까이를 보냈다. 처음 들어갔을 때의 긴장감, 처음 논문 리뷰를 받았을 때의 절망감, 저녁 9시에 혼자 남아 코드를 돌리던 모니터 빛. 그리고 — 쓰러지기 직전에 올려다본 천장.
가지 말자, 라고 생각하면 간단했다. 다른 연구실을 알아보면 된다. 다른 교수, 다른 분야. 혹은 대학원 자체를 가지 않는 선택도 있다. 이 시대의 나에게는 아직 모든 문이 열려 있다.
하지만 어제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부수적 변수의 상호작용 가능성.' 그 논문의 그 한 줄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걸 연구하려면 김혁준 교수의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 연구실의 장비가, 그 교수의 네트워크가.
결국 나는 후드를 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 • •

캠퍼스 중앙 광장을 가로질러 공학관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시우야!"
멈추었다.
기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맑고, 약간 급한 느낌. 뒤돌아보았다.
여자였다. 키는 보통, 바람에 날리는 짧은 단발머리, 한쪽 어깨에 걸친 에코백, 살짝 헐떡이는 숨. 뛰어온 모양이었다. 나를 보며 웃었다.
"역시 시우야, 전혀 안 변했다. 나 모르겠어?"
모른다. 전생에서 이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혹시 같은 과였나? 이름이 뭐였지? 머릿속의 6년 치 기억을 뒤졌지만, 이 사람에 대한 파일이 열리지 않았다.
"…미안, 잠깐 —"
"박지우. 기준이 고등학교 동창. 작년 MT에서 같은 조였잖아."
박지우.
어제 기준이가 말한 이름이었다. '어제 지우한테 한 말 취소하고 싶다.' 기준이가 국물 그릇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던. 그 지우.
"아, 맞다. 지우."
나는 모르는 사람을 아는 척했다. 전생의 나는 이 사람을 왜 기억하지 못할까. 기준이의 인간관계에 관심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이 사람이 기준이와 졸업 후 연이 끊어진 걸까.
지우는 내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눈치채고도 그냥 넘어간 건지도 모른다.
"기준이 봤어? 어제부터 연락이 안 돼."
"어제? 어젯밤에 카톡은 했는데."
"…그래?"
지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음이 사라진 건 아닌데, 눈빛의 무게가 달라졌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참는 얼굴. 전생에서 많이 본 종류의 표정이었다. 직장 동료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 후배가 야근 중에 울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상대가 들을 준비가 안 됐다고 판단했을 때의 얼굴.
"아 그냥, 전달할 게 있어서. 만나면 말해줘. 어제 한 말, 나는 괜찮다고."
지우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에코백의 끈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괜찮다고.
기준이가 취소하고 싶어 한 '그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 전생의 나는 여기에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6년을 살았는데, 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도 모른다.
• • •

공학관 5층. 507호 앞.
나는 문 앞에 서서 10초쯤 가만히 있었다. 문에는 '김혁준 교수 연구실'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전생에서 수천 번은 열었을 이 문. 그때는 아무 감정 없이 열었다. 출근하듯이, 습관적으로.
지금은 심장이 뛴다.
문을 열었다.
연구실은 기억보다 좁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비가 덜 들어차 있었다. 2019년이니까 아직 그 추가 장비들이 도입되기 전이다. 창가에 앉아 있던 대학원생 두 명이 나를 올려다봤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마 내가 석사로 들어올 때쯤 졸업한 선배들일 것이다.
"랩미팅 참관 온 학부생입니다."
"아 들어와. 거기 빈자리 앉으면 돼."
김혁준 교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수식. 선반에 꽂힌 학술지. 컴퓨터 모니터 위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들. 전생의 연구실과 같은 냄새가 났다. 커피와 종이와 먼지가 섞인 냄새.
10분쯤 지나 문이 열렸다.
김혁준 교수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안경을 쓰고, 회색 재킷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전생에서 익숙한 모습 — 하지만 지금은 6년 젊다. 머리카락이 더 검고, 얼굴에 주름이 적다. 이 사람도 6년 후에는 훨씬 지쳐 보이게 된다는 걸 나만 안다.
"다 왔나? 시작하지."
랩미팅은 석사 2학기생의 연구 진행 상황 발표로 시작했다. 30분쯤 지켜보며 느낀 건, 이 연구실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자유롭다는 거였다. 교수가 많이 물어보고, 학생이 많이 대답하고, 틀린 답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전생에서 내가 3학기쯤 됐을 때 연구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외부 프로젝트가 몰리면서부터였나.
발표가 끝나고, 교수가 나를 쳐다보았다.
"학부생이지? 이름이…"
"한시우입니다."
"한시우. 아, 졸업논문 쓰고 있다고 들었어. 주제가 뭐야?"
심장이 한 박자 뛰었다. 준비한 건 아니었지만, 어제 도서관에서 다시 읽은 3장의 내용이 선명했다. 나는 논문의 핵심 프레임과 데이터 접근 방식을 설명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학부 4학년의 어휘가 아니라 석사 졸업생의 시선이 섞여 있었다.
교수의 눈이 달라졌다.
"시우 군, 그래서 이 부분의 근거는? 왜 다변량 접근으로 잡은 거지?"
나는 대답했다. 어제 발견한 2017년 논문의 '부수적 변수의 상호작용 가능성'을 언급하며, 기존 프레임의 한계를 짚었다. 6년 뒤의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수준의 대답이었다.
교수가 잠시 침묵했다. 안경 너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잠깐 보지 못한 새에 사람이 달라졌다고 느끼면, 그것도 신기한 일이겠지. 원래도 차분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뭐랄까, 확신이 있어 보여."
차분한 게 아니라 겁이 나는 것이다. 당신의 연구실에서 내가 죽는다는 걸 아는데, 평온하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교수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우리 랩에 지원할 생각이 있나?"
• • •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멈춘 건 시간이 아니라 나였다. 입을 열었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저는—' 그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거절하면 된다. 다른 연구실을 찾으면 된다. 다른 길을 가면 된다.
그때 연구실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 번.
순간 시야가 좁아졌다. 연구실 천장의 노란 불빛이 겹쳐 보였다. 쓰러지면서 올려다본 그 형광등과, 지금 깜빡이는 이 형광등이 하나로 합쳐지며 — 숨이 멎었다.
"시우 군?"
교수의 목소리에 돌아왔다. 형광등은 다시 정상이었다. 연구실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거절의 말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생각해 봐."
랩미팅이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갔다.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거절하려 했다. 분명히. 그런데 형광등이 깜빡이는 순간, 나는 이상한 확신을 느꼈다.
이 연구실에서 도망치면, 진짜로 끝난다.
무엇이 끝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직감이 — 6년의 무게가 실린 직감이 — 단순한 공포보다 강했다.
• • •
복도로 나왔다. 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기준: 랩미팅 어땠음?
기준: 아 그리고 지우가 뭐라 전해달라던데
나는 답장을 치다가 멈추었다.
'나는 괜찮다고.'
지우의 말을 전해야 하나. 기준이는 그 말을 듣고 싶어 할까. 어제 취소하고 싶다던 그 말에 대한 답을, 나 같은 제3자가 전해도 되는 걸까.
6년 뒤에서 돌아온 나는, 미래는 알아도 옆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
공학관 복도를 걸었다. 창밖으로 캠퍼스 잔디가 보였다. 어제 기준이와 걸었던 길이다. 햇빛이 고르게 퍼져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은 손이 아직 떨리고 있었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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