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서재 — 현실 회귀물 소설
제7화: 또다른 나
2026.03.27 | 채택: 서재의문지기의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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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 채택: "시우는 변화를 수용하며, 같은 삶이 아닌 '또다른 시우'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 서재의문지기 (대댓글 0개)
일요일 아침, 기숙사 침대에서 눈을 떴다.
어젯밤 서울에서 돌아온 뒤 샤워도 안 하고 쓰러져 잤다. 성심당 빵 봉투가 구겨진 채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빈 봉투. 부모님에게 다 드리고 온 거니까.
핸드폰을 확인했다. 2019년 3월 10일. 일요일. 회귀 엿새째.
엄마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엄마: 시우야 잘 갔어?
엄마: 빵 고마웠어
엄마: 다음에 올 때는 미리 전화해
'다음에 올 때는.' 엄마는 이미 다음을 기대하고 있었다. 전생의 나라면 이 카톡에 '네'라고만 답하고 끝냈을 것이다. 아니, 읽씹했을 수도 있다.
시우: 네 다음에는 미리 연락할게
시우: 아빠 약 잘 챙겨 드시라고 해줘
보내고 나서 멍하니 화면을 보았다. 전생에서 부모님 건강을 물은 적이 있었던가. 없다. 회사 다니느라 바빴고, 야간 대학원 다니느라 바빴고, 논문 쓰느라 바빴다. 바쁘다는 말은 편리한 방패였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세수를 했다. 거울 속 얼굴. 스물다섯의 얼굴. 전생에서 죽기 직전의 내 얼굴과는 달랐다. 다크서클이 얕았고, 볼에 살이 좀 더 있었다. 아직 세상이 나를 갈아넣기 전의 얼굴.
기숙사 창밖으로 캠퍼스가 보였다. 일요일이라 한적했다. 누군가가 조깅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아까 본 것과 같은 경로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운동장 한 바퀴, 또 한 바퀴. 같은 궤도.
나도 그랬다. 전생에서.
• • •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 KTX에서 적었던 메모를 다시 꺼냈다.
바꿀 수 있는 것 — 선택, 태도, 옆에 있는 시간.
바꿀 수 없는 것 — 지나간 시간, 흐려진 기억, 그리고 아직 모르는 것.
세 번째 칸. '아직 모르는 것.' 어제는 여기서 손이 멈추었다. 오늘은 그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해볼 수 있는 것 — ?
물음표를 찍고 멈추었다. 뭘 해볼 수 있지? 전생과 다른 선택을 이미 시작했다. 풀타임 대학원. 기준에게 지우의 말을 전한 것. 부모님 집에 간 것. 설거지를 한 것.
하지만 이건 '바꿀 수 있는 것'의 연장이었다. 다른 선택을 하는 것.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또다른 나는 어땠을까.
전생의 내가 대학원에 바로 갔다면. 회사를 가지 않았다면. 기준이와 연락을 끊지 않았다면. 지우를 기억했다면. 부모님 집에 자주 갔다면. 논문 3장을 다르게 썼다면.
무한한 갈래가 펼쳐졌다. 회귀는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보다 잔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선택하지 않은 모든 길이 한꺼번에 보이니까. 큰 돈을 줄 테니 군대 두 번 갔다 올래? 라는 농담이 있다. 아무도 안 간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걸 하고 있다. 같은 삶을 다시 살고 있고, 누구도 보상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 이상하게도, 그렇게까지 괴롭지 않았다.
누군가가 시킨 것처럼 홀린 듯이, 나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준이에게 먼저 말을 걸고,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고, 부모님 집에 빵을 사 들고 가고. 전생의 내가 보면 기겁할 행동들을 별 저항 없이 하고 있었다. 마치 이 몸이 이미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처럼.
왜?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번의 나는 전생의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간에 서 있지만, 방향이 다르다.
또다른 시우.
그 말이 맞았다. 지금의 나는 '또다른 시우'다.
• • •
점심을 먹으러 나가다가 도서관 앞을 지났다. 일요일인데 불이 켜져 있었다. 시험 기간도 아닌데 누가 있을까.
습관처럼 3층으로 올라갔다. 논문이 걸렸다. 3월 11일이 졸업논문 제출 기한이다. 내일이다.
전생에서는 이 논문을 대충 마무리했다. 졸업이 목적이었으니까. 어차피 취업이 확정되어 있었고, 논문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교수님도 대충 통과시켜 주셨고, 나도 대충 냈다.
이번에는 다르다. 풀타임 대학원을 선택했으니, 이 졸업논문이 석사 연구의 출발점이 된다. 대충 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을 안다. 6년 뒤에서 돌아온 사람이니까.
노트북을 열고 논문 파일을 열었다. 3장. '부수적 변수의 상호작용 가능성.' 며칠 전 도서관에서 발견한 아이디어. 전생에서는 이 부분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잡았다.
읽다 보니 몇 군데가 보였다. 근거 데이터가 약한 부분, 논리가 비약하는 부분. 전생의 경험이 없었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것들. 하지만 미래의 기억은 방향은 알려주되 구체적인 해답은 주지 않았다. '여기가 약하다'는 직감만 있고, '이렇게 고치면 된다'는 답은 없었다.
치트키는 역시 없다. 다만 — 어디를 봐야 하는지는 안다.
한 시간쯤 수정하다가 기지개를 켰다. 옆 자리를 보니 누군가의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나.
노트 위에 '부수적 변수 — Merton(1973)' 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리가 깔끔했다. 같은 주제를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노트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시선을 돌렸다. 상관없는 일이다.
다시 화면을 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이 자리에 앉은 적이 있다. 며칠 전에도. 그때도 옆자리에 노트가 있었던 것 같은데 — 아니, 그건 이 자리가 아니라 반대편이었나? 기억이 뒤섞였다. 같은 도서관, 같은 3층, 같은 오후. 구도가 겹치는 느낌.
고개를 저었다. 회귀 이후로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탓이다. 어제와 6년 전이 뒤섞이니까 당연하다.
• • •
저녁 무렵, 기준이에게 카톡이 왔다.
기준: 내일 논문 제출이지?
시우: 응 마무리 중
기준: 나도… 근데 3장이 좀 별론데
시우: 3장?
기준: 응 지도교수님이 근거가 약하다고
시우: 어떤 부분?
기준: 부수적 변수 처리가 좀… 아 이거 니 분야잖아 ㅋㅋ
시우: 보내봐 한번 볼게
보내고 나서 멈추었다. 전생에서 기준이의 논문을 본 적이 있던가? 없다. 같은 과인데도 서로의 논문에 관심이 없었다. 각자 살아남기에 바빴으니까.
기준이 논문 파일을 보내왔다. 열어보니 시우의 논문과 비슷한 부분에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부수적 변수. 방법론은 달랐지만 핵심 고민은 같았다.
한 시간 동안 기준의 논문을 읽었다. 교정 사항을 카톡으로 보냈다. 너무 길어서 메시지가 세 통으로 나뉘었다.
기준: ……
기준: 너 이거 다 읽은 거야?
기준: 일요일 저녁에?
시우: 읽었지
기준: 시우야
기준: 너 진짜 변했다
시우: 뭐가
기준: 예전에는 자기 거 끝나면 먼저 자버렸잖아
기준: 남의 논문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맞다. 전생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시우: 그냥 읽다 보니까
기준: 고맙다 진심으로
기준: 내일 수정해서 낼게
기준: 밥 살게
'밥 살게.' 전생에서 기준이 이 말을 한 적이 있을까. 아마 없다.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까.
화면을 내리다가 멈추었다. 기준의 프로필 사진. 기준이와 지우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고등학교 교복. 둘 다 웃고 있었다.
지우. 기준에게 '나는 괜찮다고' 전해달라던 사람. 작년부터 김 교수 랩에서 연구 참여를 하고 있었다는 사람. 전생에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괜찮다는 말이 제일 무서운 거라고 기준이 말했었다.
지우의 '괜찮다'는 진짜 괜찮다는 뜻일까. 아니면 엄마의 '괜찮다'처럼, 누군가를 위해 괜찮은 척하는 것일까.
아직 모르는 것. 메모의 세 번째 칸이 또 떠올랐다.
• • •

밤 열한 시. 논문 수정을 마치고 저장했다.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읽고 제출하면 된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기숙사 천장의 형광등은 꺼져 있었다. 스탠드 불빛만 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전생에서 이 시간에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졸업논문을 대충 마무리하고, 취업 합격 통보를 기다리면서, 기준이의 카톡을 씹고, 부모님에게 전화도 안 하고, 혼자 자기소개서를 고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논문을 제대로 고쳤고, 기준의 논문도 봐줬고, 엄마에게 아빠 약 챙기라고 카톡을 보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침대.
하지만 하루를 채운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또다른 시우.
이 말의 의미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회귀는 같은 삶을 반복하는 게 아니었다. 같은 시간 위에 다른 나를 올려놓는 것이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채우는 것이 다르면 다른 사람이 된다.
큰 돈을 줄 테니 군대 두 번 갔다 올래?
아무도 안 간다. 하지만 만약 두 번째 군대에서 처음에 못 만났던 전우를 만난다면. 처음에 무시했던 훈련을 다시 해보니 다른 의미가 보인다면.
보상은 없다. 하지만 처음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것 — 그것 자체가 다른 삶이 된다.
핸드폰을 들어 기준에게 마지막 카톡을 보냈다.
시우: 내일 제출하고 밥 먹자
기준: ㅇㅇ 학식?
시우: 아니 밖에서
기준: 오 시우가 밖에서? ㅋㅋ
기준: 알겠어 내일 보자
'내일 보자.'
전생에서 이 말은 습관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약속이었다. 내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그 내일에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
스탠드를 끄기 전에, 메모장을 다시 열었다.
해볼 수 있는 것 — 처음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것.
물음표를 지우고 한 줄을 채웠다.
이제 칸이 세 개가 되었다.
바꿀 수 있는 것.
바꿀 수 없는 것.
해볼 수 있는 것.
스탠드를 껐다. 어둠 속에서 천장 형광등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깜빡이지 않았다. 조용히, 그냥 거기에 있었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논문을 제출한다. 전생에서도 제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논문이다. 같은 파일명, 같은 포맷, 같은 교수님에게 내지만 — 안에 담긴 것이 다르다.
나처럼.
,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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